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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7 조선왕조계보 1대~27대(1392~1910)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충숙왕 복위 4∼태종 8))


조선 제1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즉위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대담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선조들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에서 원(元)나라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자춘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內應)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1361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독로강만호(禿禿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홍건적에게 유린된 개경(開京)을 1362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그해 원나라 나하추[納哈出(납합출)]의 침입을 함흥평야에서 격퇴시켰고, 13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여 원병(元兵) 1만 명으로 평안도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에서 모두 물리쳤다. 이어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격퇴, 동북면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68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77년(우왕 3) 경상도·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1380년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基拔都(아기발도);阿只拔都(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파하였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 호바투[胡拔都(호발도)]를, 1384년 함주(咸州;지금의 咸興)에 쳐들어 온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명(明)나라 철령위 설치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우군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1390년 8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1391년 다시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392년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따랐으나, 1393년(태조 2) 3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 또한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정책·숭유배불정책·농본민생정책 등 3대정책을 내세웠다. 1393년 9월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 왕성 건설을 시작, 1394년 10월 천도하였고 1396년 9월에 4대문(肅靖門·興仁門·崇禮門·敦義門)과 4소문(光熙門·昭德門·彰義門·弘化門)을 갖춘 궁성의 규모를 완성하였다.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육전(經濟六典)》 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뒤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하였으나 정비 소생 방원(芳遠)이 불만을 품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의 요청대로 방과(芳果;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조 2) 방원이 세자로 책립되고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이 상왕으로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주로 가 지내다가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왔다. 태조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問安) 차사(差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죽었다. 묘호는 태조, 능호은 건원릉(健元陵).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공민왕 6∼세종 1))


조선 제2대 왕(1399∼1400). 이름은 경, 자는 광원(光遠). 태조의 둘째 아들로 성품이 순직(純直), 근실하고 지행이 단엄하며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진출, 1377년(우왕 3) 부친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으며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후에 방원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방원이 거절하자 정종이 세자로 책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정당문학 겸 대사헌 권근(權近)과 김약채(金若采)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삼군부(三軍府)에 편입시켰으며,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개편하면서, 의정부는 정무를,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게 하였다.
또, 이에 앞서 1399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담당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1400년 왕위를 아우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지내다가 천수를 다하였다. 1419년(세종 1)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묘호(廟號)가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공민왕 16∼세종 4))


조선 제3대 왕(1400∼1418).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한때 길재(吉再)와 학문을 강론하고, 원천석(元天錫)에게서 배웠다. 1382년(우왕 8) 문과 급제, 1388년(창왕 즉위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난징[南京(남경)]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고, 정도전(鄭道傳) 등과 도모,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게 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으나,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었다. 1394년 난징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입명문제 등 명나라와의 관계를 해결하고 귀국하였다. 1398년 정도전 등의 요동정벌계획이 추진되어 자신의 사병기반이 혁파당하자 공신책록과 세자책봉에서 탈락된 불만이 폭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芳碩)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사양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네째 형 방간(芳幹)과 박포(朴苞) 등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세자로 책봉되면서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어 그해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확립을 위하여 이거이(李居易)·이저 등 공신과 외척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1401년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면서 의정부 구성원만으로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는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1402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민원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고, 《동국사략(東國史略)》 《태조실록(太朝實錄)》을 편찬하고 《고려사(高麗史)》를 개수케 하였다. 호패법(號牌法)을 실시, 양반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지하게 하여 인적자원을 관리하였다. 유교의례를 보급하여 개가한 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못하게 하여 적서차별을 엄격히 하였다.
1404년 한양(漢陽)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1405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의 전환을 위해 의정부기능을 축소하고 육조장관의 품계를 정2품 판서로 높였다. 1414년 육조직계제를 단행, 왕-의정부-육조의 체계를 왕-육조의 체계로 전환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1412년 병조로 하여금 군정을 전담하게 하는 한편, 11도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여 지방군을 정비하고 군역에서 제외되었던 향리·공사노비·교생 등으로 잡색군을 조직하였으며, 해안경비를 위해 병선을 건조하고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또 양전사업을 펼쳐 모두 120만 결의 전지를 확보하였고, 양곡저장 창고를 늘려 1417년 비축곡이 415만 5401석에 이르렀다. 1413∼1417년 지방제도를 개편,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후반에는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원활한 경제유통을 꾀하였다. 문화·사상면에서는 억불정책을 강화하여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사원의 토지·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비기(秘記)·도참(圖讖)사상을 엄금하였다. 1418년 세자(世宗)에게 선위(禪位)하였다. 묘호는 태종, 능호는 헌릉(獻陵).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태조 6∼세종 32))


조선 제4대 왕(1418∼50).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비(妃)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대군에 진봉(進封), 1418년 형 양녕대군(讓寧大君) 대신 왕세자에 책봉되고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도 섭립하였다. 즉위한 뒤에도 매일 경연(經筵)에 나가 유신(儒臣)들과 강서(講書)하고 편전(便殿)에서도 서사(書史)를 열람하였다. 부왕인 태종이 확고하게 구축한 정치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하였다.
세종대는 개국공신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 관료(儒者的官僚)들이 유학에 소양이 깊은 국왕과 함께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었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 분위기는 후반기에 이르러 더욱 안정되면서도 유연성이 있었다. 이것은 세종대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양성, 배출되어 유교적 의례·제도가 정비되고 수많은 정책과 교화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됨으로써, 유교정책의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최윤덕(崔潤德)·신개 등 원로대신들의 보좌를 받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원동력은 우선 세종의 깊은 학문과 탁월한 경륜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도 컸다. 1420년(세종 2) 설치된 집현전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의 구현을 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그 목적이 있었다.
집현전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知製敎) 등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 등 주로 학술적인 직무에 종사하였는데, 장래가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선발, 여러 가지 특전을 주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의례·제도의 정리작업에 참여,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국가의례인 <오례>와 일반백성의례인 <사례> 등 유교적인 전반 제도를 정리하였다.
한편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완벽하게 보완할 목적으로 법전의 수찬(修撰)에 직접 참여하여 《속육전》과 《육전등록(六典謄錄)》을 완성하고, 그 뒤 개수를 계속함으로써 법제적 측면에서 일단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금부삼복(禁府三覆)의 3심제를 실시하고 노비구살(奴婢歐殺)의 방지에 모범을 보였다. 세종의 업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로, 이는 한국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을 장려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을 펴냈다.
한편 그는 천문·지리·역산(曆算)·음운(音韻)·음악·병학 등 여러 방면을 두루 연구하였으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노력하였다. 먼저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러 가지 천문기기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대간의(大簡儀)·소간의·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 및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고금의 천문도를 두루 참작한 새 천문도와 세계 최초로 우량(雨量)을 측정했던 측우기(測雨器)가 제작되었으며, 역법을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정리하여 그 결과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농법(農法)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여 《농상집요(農桑輯要)》 《사시찬요(四時纂要)》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 등의 농서를 통해 농업기술을 계몽·권장하였고, 《농사직설(農事直設)》을 편찬, 반포하게 하여 농업발전에 이바지했다. 의약에 있어서도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약서적이 편찬, 간행되었다. 한편 각종 서적의 간행에 따라 인쇄술이 개량되어, 1420년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가 주조되고, 1434년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가 주조되었으며, 1436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으로써 조선시대 금속활자 및 인쇄술은 세종대에 일단 완성되었다.
또한 음악에 있어서는 박연(朴堧) 등의 협력을 받아 아악 부흥, 악기 개량, 정간보(井間譜) 창안, 아악 및 향악곡 제작 등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한편 무비(武備)에도 힘써 북변에 육진(六鎭)·사군(四郡)을 설치했고, 군사훈련·무기제조·성진수축(城鎭修築)·병선개량·병서간행 등에도 힘썼다. 세종은 재위 32년간 내정·외치·문화 등에 크게 이바지하여 한국역대 군주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으며 <동방의 요순(堯舜)>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驪州郡)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태종 14∼문종 2))
조선의 제5대 왕(1450∼52). 휘는 향(珦), 자는 휘지(輝之).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비(妃)는 권전(權專)의 맏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세종의 맏아들로 1421년(세종 3)에 세자로 책봉되어 20여 년 동안 세종을 도왔다. 학문에 밝고 인품이 너그러우며 온후하였다. 언로(言路)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으며, 문무(文武)를 아울러 중용함으로써 신민(臣民)의 신망이 컸다.
1450∼1452년에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간행·완성시켰으며, 《진법구편》을 친히 만들었다. 군제를 재정비하는 데에도 힘써 12사(司)를 5사로 줄여 여기에 각 병종(兵種)을 배분하는 동시에 병력을 증대시켰다. 유학을 비롯하여 천문·역법·산술에 정통하였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적극적으로 정치는 하지 못하여 결국 단종의 참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능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시호는 공순(恭幀).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세종 23∼세조 3))
조선 제6대왕(1452∼55).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文宗),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삿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 등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온성(穩城)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았으며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이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한명회의 계책에 따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고,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주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사사되었고, 그 아들 우직(友直)은 진도에 유배되었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이 달에 양성지(梁誠之)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급박한 주변 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다.
1456년(세조 2) 6월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 등과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등에 의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김질의 고발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태종 17∼세조 14))
조선 제7대 왕(1455∼68). 이름은 유,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처음에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데 적극협조하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과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를 감장(監掌),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이해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인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단행하여 조정 안에 있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고, 즉위 뒤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한국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하게 하였으며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한 사실이 발각되자 관련된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1458년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심으려는 의도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수하고,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서 재조명한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정치 정세가 안정됨에 따라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게 하여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하여 1462년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6년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고, 종래의 시직(時職;현직)·산직(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를 시행하였다.
한편 1467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을 무사히 평정하여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해석하고, 윤리교과서인 《오륜록(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문화사업으로는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및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制詩文)의 편집, 발간 등을 하였다.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왜인(倭人)에게는 물자를 주어 회유하였고, 야인(野人;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의 목을 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자기의 소신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의 방법을 택하였다. 즉위 직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 육조의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여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고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으며, 단종복위사건을 계기로 집현전·경연 등을 폐지하여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 면에서는 공정할 수 있으나 정치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

제8대 예종 (睿宗 1441∼1469)
조선 제8대 왕(1468∼69). 자는 명조(明照), 이름은 광(晄).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비(妃)는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이고 계비는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처음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 세조가 위독하자 9월 즉위하였으나 재위 14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중 직전수조법(職田收祖去)을 제정하였으며, 둔전에 대한 일반 농민의 경작을 허락하였다. 또한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천하도(天下圖)》 《무정보감(武定寶鑑)》이 만들어졌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하게 하였다. 한편 남이(南怡)의 옥(獄)이 일어났으며, 1469년 4월에는 민수사옥(閔粹史獄)이 일어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시호는 소효(昭孝).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세조 3∼성종 25))
조선 제9대왕(1469∼94). 이름은 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9년 예종이 죽자 13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뒤 7년 동안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1476년(성종 7)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1485년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 오던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하여 법제를 완성하였다.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사림세력(士林勢力)을 등용하여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84년과 1489년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을 나누어 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으며, 홍문관을 확충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과 1491년에는 국경지방의 야인들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시호는 강정(康靖).

제10대 연산군 (燕山君 1476∼1506(성종 7∼중종 1))  
조선 제10대 왕(1494∼1506). 이름은 이륭(李隆). 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지평 윤기묘의 딸 폐비 윤씨이다.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었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을 회유,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의 설치, 빈민의 구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부활,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의 간행과 《속국조보감》 《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완성 등 즉위 초에는 다소 치적을 쌓았으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異常性格)이 형성되어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고 많은 실정(失政)을 저질렀다.
1498년 학문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이용하여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이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士林派)를 대량으로 숙청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 윤씨 사사사건의 전말을 듣고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이에 관련된 후궁들과 김굉필(金宏弼) 등 제신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삼고 사간원의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경연(經筵)을 폐지하는 등 방탕한 생활로 민생을 혼란에 빠뜨렸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2남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군(君)으로 강봉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桐)에 유배되어 죽었다.

제11대 중종 (中宗 1488∼1544(성종 19∼중종 39))
조선 제11대왕(1506∼1544). 이름은 역,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정비(正妃)는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이고 제1계비(第一繼妃)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이며 제2계비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하여졌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모의하여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中宗反正). 중종은 정치면에서는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사림파중심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림세력의 개혁정치는 기성훈구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중종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때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문제(僞勳削除問題)를 계기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림세력을 숙청하였다. 그 후 정치적인 혼란과 옥사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숙청되고 1524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파직, 1525년 유세창(柳世昌)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敬嬪朴氏) 폐위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으로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과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의 등장은 훈신과 척신의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나라의 남북에서는 외환에 시달렸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추자도(楸子島)와 동래염장(東萊鹽場)왜변, 1524년 야인(野人)의 침입 등 남왜북로(南倭北虜)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았다. 사회면에서는 소격서(昭格署)와 불교의 도승(度僧)제도를 폐지하였으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1516년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학(小學)》 《이륜행실(二倫行實)》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 《사성통해(四聲通解)》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등 각종 서책과 문헌들을 편찬, 간행하였다. 또한 역대 실록을 사고(史庫)에 배치하고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반포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권장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 발달에도 힘썼으며 명나라에 기술자를 보내어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 훈금술(燻金術)을 배워오게 하였고 창덕궁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고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의 서적을 구입,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죽었다. 능은 경기도 광주(廣州) 정릉(靖陵)이다.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중종 10∼인종 1))
조선 제12대 왕(1544∼1545). 자는 천윤(天胤). 이름은 호(岵). 중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비는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1520년(중중 15)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524년 혼인하였다. 3살 때부터 글을 읽었으며, 근검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1527년 서형(庶兄)인 복성군(福城君) 미(嵋)가 그의 어머니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교만으로 모자가 귀양을 가게 되자 이를 석방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효심이 깊어 중종의 병이 중해지자 친히 간병하였다. 1544년 즉위하여 이듬해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하였다. 1545년 병으로 위독해지자 아우인 경원대군(慶源大君) 환(뒤의 明宗)에게 전위하였고, 자녀가 없었으므로 외사촌인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에게 장사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능은 효릉(孝陵).

제13대 명종 (明宗 1534∼1567(중종 29∼명종 22))
조선 제13대 왕. 이름은 환, 자는 대양(對陽). 중종의 둘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명종의 즉위 당시는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무오·갑자사화와 기묘사회로 표출되면서 파벌대립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와 함께 중종 말년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장경왕후(章敬王后) 소생인 세자 호(岵: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인 환(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의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로 대윤이 권력을 잡았으나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이를 기회로 윤원형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량(李樑) 부자를 기용하였으나 이량은 오히려 파벌을 조장하여 정치적 혼란과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할 때까지 명종은 외척의 전횡 속에서 안정된 세력기반을 갖지 못하였다. 이후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선정을 베풀려 노력하였으나 1567년 34세로 죽었다.
명종의 재위기간에는 을사사화, 도적 임꺽정[林巨正(임거정)] 일당의 창궐, 1555년의 을묘왜변(乙卯倭變)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였다. 이에 1510년(중종 10)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기구로 승격시켜 군사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 수차(水車)가 제조되고 간행사업이 실시되어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원전과 속전이 간행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강릉(康陵)에 예장되었다. 시호는 공헌(恭憲).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조선 제14대 왕(1567∼1608). 초명은 균(鈞), 뒤에 공으로 개명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였다.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간행, 널리 읽히게 하였다.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을사사화 때 녹훈된 이기·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또한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중국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선조대까지 전해오자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이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고 동인도 남북으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려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1583년·1587년 2회에 걸쳐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립(申砬)과 신상절(申尙節)을 보내어 그들을 소탕하였다. 1590년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보내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여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의주(義州)로 피난하고 명(明)나라에 고급사(告急使)를 보내서 원병을 청하였다. 의병의 봉기, 이순신(李舜臣) 등에 의한 수군의 제해권(制海權) 장악과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으로 적이 퇴각하자 1593년 10월 환도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군공(軍功)을 세운 자나 납속(納粟)한 자는 논공할 때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조선 후기 신분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고 부산에만 군사가 집결하자 이를 염려하여 호남지역과 육지에도 군대를 배치하게 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공신을 녹훈하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이 격심해져서 큰 시련을 겪었다. 능은 목릉(穆陵). 전(殿)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선조 8∼인조 19))
조선 제15대 왕(1608∼1623). 휘는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恭嬪) 김씨(金氏)이다. 형 임해군(臨海君) 진이 광포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선조가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고 있어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난지 평양(平壤)에서 세자에 책봉된 후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서자(庶子)이며 둘째 아들인 그의 즉위를 두고 소북(小北)은 영창대군의 옹립을 주장하고,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해 당쟁(黨爭)으로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선위(禪位)의 교서를 내려 즉위했다. 즉위 후 대북파의 주장으로 임해군을 유배하고 소북파의 제1인자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했다. 원로대신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파적인 정책을 구현하여 당쟁을 종식시키고자 했으나, 정인홍(鄭仁弘)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1년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고,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많은 학자·문신들을 추방했다. 1613년 대북파가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誣告)하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유배시켰다(癸丑獄事). 이듬해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죽였으며 1615년 이원익을 파직하고 대북의 음모로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을 꾸며 많은 학자·문신들을 추방하였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삭호(削號)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명나라와 후금의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를 전개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찬술하였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계인(繼印)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간행하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으며, 인경궁(仁慶宮)·자수궁(慈壽宮)·경덕궁(慶德宮)을 세우는 등 치적이 많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광해군으로 강봉되고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제주(濟州)에 이배되어 죽었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선조 2∼인조 27))
조선 제16대 왕(1623∼1649).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이름은 종(倧). 선조의 손자이며 원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는 조창원(趙昌遠)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능양군(綾陽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의 폭정에 대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자 영창대군(永昌大君) 의, 임해군(臨海君) 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구하였다. 반정 후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공주(公州)로 남천(南遷)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만 시험적으로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였으며, 1624년에는 총융청·수어청을 설치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외교적으로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취했다. 1627년 후금(後金)이 쳐들어오자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가, 정묘화약으로 형제의 의를 맺고 환도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저항하다 삼전도(三田渡;지금의 松坡)에서 항복하고 군신의 의를 맺었다. 1639년 청(淸)나라의 요구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웠다. 학문에 힘써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였다. 능은 장릉(長陵).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광해군 11∼효종 10))
조선 제17대 왕(1649∼59). 휘는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며,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
1645년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하였으나 2개월 만에 죽자 곧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北伐)을 위한 준비에 착수,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 등 반청파를 등용시켰다. 그러나 친청파로 파직당한 김자점(金自點) 등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적극적인 준비를 하지 못하고, 다만 일본의 재침이 우려된다는 핑계로 남부지방에서 군비(軍備)를 하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이듬해 이완(李浣)·원두표(元斗杓) 등을 등용하여 본격적인 북벌준비에 착수하였다. 군제를 개편하고 영장제도(營將制度)와 속오군(束伍軍)에 보인(保人)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에 내실을 기하고자 하였으며, 성지(城池)의 보수도 서둘렀다.
또한 조선에 표류해 온 H.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러시아 정벌을 위해 조선의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나서게 되었으며 청나라 세력이 더욱 강해짐에 따라 북벌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외침으로 인한 경제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전라도 연안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역법(曆法)을 개량하여 시헌력(時憲曆)을 제작, 사용토록 하였다. 《인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농가집성(農家集成)》 《내훈(內訓)》 《선조수정실록》 등을 간행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능서면(陵西面) 영릉(寧陵)이다. 시호는 명의(明義).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인조 19∼현종 15))
조선 제18대 왕(1659∼74). 이름은 연. 자는 경직(景直). 효종의 첫째아들이며, 모후는 인선왕후(仁宣王后), 비는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효종이 즉위하기 전 청(淸)나라 선양[瀋陽(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출생하였다. 1651년(효종 2)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재위기간 대부분이 예론과 같은 정쟁(政爭) 속에 지내는 등 당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즉위 후 효종의 상례(喪禮)로 일어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滋懿大妃)의 제1차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지지하였고, 1674년(현종 15) 모후 인선대비 상례로 인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서는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하였다.
1660년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격퇴하고 변방의 관청을 격상시켰다. 1662년 경기도지방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농업진흥에 힘쓰고,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1668년 동철활자(銅鐵活字) 10만여 자를 주조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연구에 이바지하였다.
효종 때의 북벌계획을 중단하는 대신 군비강화에 힘써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으며, 동성통혼을 금지하고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九里市)에 있는 숭릉(崇陵)이다. 시호는 소휴(昭休).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현종 2∼숙종 46))
조선 제19대 왕(1674∼1720). 이름은 순,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다.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당시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였으나, 1680년 허견(許堅) 등의 복선군(福善君) 추대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그 뒤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9년 장씨에게서 왕자(후일의 경종)가 태어나자 세자 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禧嬪)이 된 장씨를 1690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1694년 폐출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된 반면,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였다(甲戌換局). 그 뒤 노론·소론의 불안한 연정(聯政)이 지속되다가 1716년 노론이 중용되었다. 재위 동안은 거의 사생활과 관련되어 붕당정치가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였으나,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작업이 거의 끝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경제적인 면에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으며, 주전(鑄錢)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중앙관청·지방관아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대외적인 치적으로는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변에 무창(茂昌)·자성(慈城)의 2진(鎭)을 신설하여서 옛 영토 회복운동을 시작하고, 1712년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국경선을 확장시켰다.
이 시기에는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서오릉(西五陵)의 명릉(明陵)이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숙종 14∼경종 4))
조선 제20대 왕(1720~1724). 이름은 윤(?),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아들. 어머니는 희빈(禧嬪) 장씨(張氏), 비(妃)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이다. 1690년(숙종 16) 3세 때 세자(世子)에 책봉되자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이 그 상조론(尙早論)을 주장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717년(숙종 43) 숙종은 본래 신병(身病)이 있는 세자를 걱정하여 비밀리에 노론의 이이명을 불러 후사(後嗣)는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 해 세자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명하였는데, 이로부터 그를 지지하는 소론(少論)과 노론이 크게 대립되었다.
즉위한 이듬해인 1721년(경종 1) 후계자를 세우자는 노론의 건의로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 다시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소론측이 크게 반발하여 철회하고 다시 친정(親政)하였으며,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으로 세제 대리청정을 건의한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1722년 노론이 시역(弑逆)을 꾀하고 이이명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유배중인 4대신을 사사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하였는데, 이를 신임사화라 한다. 그 이후로 소론은 정권을 전횡하여 노론에 대하여 가혹한 탄압을 벌였으며, 그는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능은 의릉(懿陵;서울 석관동 소재)이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조선 제21대 왕. 재위 1974~76.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이름은 금(昑). 아버지는 숙종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崔氏)이다. 비는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노론(老論) 김창집(金昌集) 등의 건의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어 노론측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하여 일단 허락을 받았으나 소론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노론이 실각하자 지지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즉위하여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 주동자들을 숙청하고 노론정권을 수립하였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蕩平策)을 기본정책으로 당쟁의 방지에 힘썼다. 한편 가혹한 형벌과 남형(濫刑) 등을 폐지하여 인권을 존중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어려운 일을 직접 알리게 하였다. 경제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역(軍役)을 감소시켰다.

또한 사회정책에 힘을 써 서얼(庶孼)도 관리로 등용하였고,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으며, 동색(同色)간에 혼인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국방에서는 진보(鎭堡)의 신축, 성(城)의 개축, 군기(軍器)의 수급, 해골선 및 화차(火車)의 제작 등에 힘썼다. 그리고 《속대전(續大典)》을 편찬, 법령을 정비하였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소학훈의(小學訓義)》 《여사서(女四書)》 《누주통의(漏籌通義)》 《무원록(無寃錄)》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 재야에서 기반을 넓히던 실학(實學)에 이해가 깊어 실학풍을 진작시켰으며, 풍속·도의(道義)의 교정에 힘쓰는 등 사회·문화·산업·예술의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는 등 비극이 있었으나, 조선 역대 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고 각 방면에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제22대 정조 (正祖 1752∼1800(영조 28∼정조 24))
조선 제22대 왕(1776~1800).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장헌세자(莊獻世子;莊祖)의 아들로, 어머니는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이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아버지가 비극의 죽음을 당한 뒤 효장세자(孝章世子;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1775년 대리청정을 하다가,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즉위 직후 홍국영(洪國榮)을 중용하여, 장헌세자를 죽이게 하고 자신의 즉위를 끈질기게 방해하였던 벽파(僻派) 일당을 축출하고, 이어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써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구축하였다.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蕩平策)을 계승,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문운(文運)을 진작하였으며, 서얼(庶孼)을 등용하고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였다.

한편, 세손 때부터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제도의 정비작업을 계승·완결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문원보불》 《동문휘고(東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제도의 개편에도 힘을 써,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형정(刑政)을 개혁했으며,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고, 《자휼전칙(字恤典則)》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 등을 반포하였다. 재위기간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이른바 <도미적(掉尾的) 성관(盛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저술로 《홍재전서》가 있다. 능은 수원 화산(花山)의 건릉(健陵).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정조 14∼순조 34))
조선 제23대 왕(1800∼1834).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이름은 공이다.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6월에 정조가 죽어 11세로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英祖繼妃)가 수렴청정하였다. 1802년(순조 2)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純元王后)로 맞았다.
대왕대비는 정조 때부터 집권해 오던 시파(時派)에 대한 보복을 꾀하여,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천주교도들을 학살할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으며, 이어 200여 명의 교인들을 몰살하였다(辛酉迫害). 1804년 친정(親政)하게 되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1815년 경상도·충청도·강원도의 교인들을 잡아죽이고(乙亥迫害), 1827년에는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국구(國舅) 김조순에 의한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어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 등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전횡(專橫)하였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 등이 난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였으나 이듬해 평정되었고 1813년 제주도 양제해(梁濟海)의 민란과 1817년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 등의 모반(謀叛) 등 수많은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풍양(豊壤)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세자(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능은 인릉(仁陵)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다.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순조 27∼헌종 15))
조선 제24대왕(1834∼1849). 자는 문응(文應),호는 원헌(元軒). 이름은 환(奐)이다. 순조의 손자이며 익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며, 비는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이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순조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다. 1841년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으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다시 안동 김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 아래서 세력다툼과 삼정문란으로 국정이 혼란하고 민생고가 극심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활용한 가톨릭 탄압으로 1839년 주교 L.J.M. 앵베르, 신부 P.P. 모방과 J.H. 샤스탕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학살한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키고, 1846년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처형하였다. 한편 《열성지장(列聖誌狀)》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삼조보감(三朝寶鑑)》 등을 찬수하고, 각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치적을 남겼다. 1849년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경릉(景陵)이다.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순조 31∼철종 14))
조선 제25대 왕(1849∼1863). 자는 도승, 호는 대용제(大勇齋). 이름은 변.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변은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농군으로 지낸데다 나이도 어렸는데 별안간 명을 받아 6월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고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1852년부터는 철종이 친정을 하여 기근 및 가뭄·화재·수해지역 등을 대상으로 빈민구제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는 안동김씨 일족에 의해 좌우되어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삼남지방 등 여러 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민란의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그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865년(고종 1) 4월 7일 경기도 고양(高陽)에 예장되어,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

제26대 고종 (高宗 1852∼1919(철종 3∼순종 13))
조선 제26대 왕(1864∼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인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1852년 음력 7년 25일 정선방(貞善坊) 소재의 흥선군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년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인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인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제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12세의 어린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하게 하였다.
그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과는 달리 개방정책을 펴서, 1876년에는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고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 오자,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疏運動)·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혁명운동 등으로 개화·수구 양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게다가 급격하게 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열강의 이권다툼의 싸움터가 되어 청일전쟁·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민비시해사건이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까지 일어났다.
1897년 10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여 황제위에 올랐으나, 1907년 6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호소하고자 특사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보낸 일로,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을 위배한 책임을 지고 같은해 7년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이 때에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가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홍릉(洪陵;金谷). 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제27대 순종 (純宗 1874∼1926)
조선 제27대 마지막 왕(1907∼1910).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아들.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 1875년(고종 12) 2월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1897년(고종 34) 황태자로 책봉되어, 1907년(순종 1)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압력과 일부 친일정객의 매국행위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이 체결되었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간섭권을 탈취한 일본은 한국군대를 강제해산시키고 사법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국권을 침탈하여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무력 강점하였다. 순종은 황제의 지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으로 불리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도록 조처가 취해졌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의 유릉(裕陵)이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하여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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